
여자 스티브 잡스!
실리콘밸리를 뒤흔든 피 한 방울!
그리고 사기!
네이선 필더의
‘You Can See Everything’
검은 터틀넥. 유난히 낮은 목소리.
대학을 중퇴한 젊은 창업자.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대한 선언.
그리고 기존 산업을 통째로 뒤집겠다는 기술.
한때 미국 언론이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비교하며 추켜세운
한 여성이 있었다. 이름은 엘리자베스 홈즈.
그녀가 만든 회사는 테라노스였다.
포춘은 당시 홈즈가
수십 차례 '여자 스티브 잡스'라고
불렸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시작은 겨우 19살이었다
홈즈는 2003년
스탠퍼드대학교를 중퇴하고
혈액검사 회사를 만들었다.
당시 나이는 19세였다.
처음 회사 이름은
Real-Time Cures였고
이후 Therapy와 Diagnosis를 합쳐
Theranos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목표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병원에서 굵은 주삿바늘로
여러 통의 피를 뽑는 대신
손가락 끝을 살짝 찔러 얻은
몇 방울의 피만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피 한 방울이면 무엇이 가능하다고 했나?
테라노스가 세상에 내놓은 약속은
단순히 채혈량을 조금 줄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작은 혈액 샘플만으로
수십에서 수백 가지 검사를 빠르고, 저렴하고,
정확하게 할 수 있다고 홍보했다.
콜레스테롤이나 혈당부터
각종 질환을 확인하는 검사까지
하나의 작은 기기로 처리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핵심 기계의 이름은 '에디슨'
테라노스가 내세운 대표 장비는
에디슨(Edison)이었다.
혈액을 담는 작은 용기에는
나노테이너(Nanotainer)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기존 대형 검사장비를
책상 위의 작은 기계로 바꾸겠다는 발상은
의료계의 아이폰처럼 들렸다.
검사가 싸지고 빨라지면
환자는 병원과 검사실에
덜 의존해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열광했을까?
혈액검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주삿바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손가락 한 번 찌르는 검사만으로
건강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엄청난 혁신처럼 들렸다.
더구나 검사비까지 싸진다고 했다.
기술의 내용과 사업의 명분이
모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좋았다.
검은 터틀넥까지 스티브 잡스였다
홈즈는 스티브 잡스를
적극적으로 동경했다. 공개석상에서는
검은 터틀넥을 반복해서 입었다.
전직 직원들은
홈즈가 잡스의 복장에 관심을 가진 뒤
비슷한 스타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회사 내부의 강한 비밀주의 역시
애플식 문화를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았다.
목소리까지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홈즈의 낮고 굵은 목소리도 유명했다.
전직 직원과 스탠퍼드 관계자들은
과거에는 그렇게 낮은 목소리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홈즈 자신도 훗날 인터뷰에서
과거의 낮은 목소리가
연출된 측면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사업가 엘리자베스 홈즈와
실제 엘리자베스 홈즈 사이의 경계는
그때부터 이미 화제가 됐다.
그리고 돈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테라노스는 비상장회사였지만
투자자들이 매긴 기업가치는
한때 90억달러까지 올라갔다.
홈즈가 약 절반의 지분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되면서
포브스는 2014년
그녀의 재산을 45억달러로 추산했다.
당시 30세였던 홈즈는 세계에서 가장 어린
자수성가 여성 억만장자로 소개됐다.
45억달러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홈즈가 가진 것은
상장주식이나 현금 45억달러가 아니었다.
테라노스가 90억달러 가치가 있다는
투자자 평가를 바탕으로
그녀의 비상장 지분가치를 계산한 숫자였다.
그래서 회사 가치가 무너지자
그 재산도 함께 사라졌다.
포브스는 2016년 홈즈의 순자산 추정치를
45억달러에서 0달러로 낮췄다.
투자받은 돈은 7억달러가 넘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 SEC가 2018년 밝힌 내용을 보면
테라노스와 홈즈 등은 투자자들로부터
7억달러 이상을 끌어모았다. SEC는 이 과정에서
기술과 사업성과, 재무상태 등에 대해
거짓 또는 과장된 설명이 사용됐다고 판단했다.
투자자 이름도 평범하지 않았다
오라클 공동창업자 래리 엘리슨,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 등
막대한 자산을 가진 사람들이 투자했다.
홈즈가 의료기술 전문가가 아니었어도
'저런 사람들이 투자했다면
뭔가 있는 것 아닐까?'라는
신뢰가 다시 만들어지는 구조였다.
이사회는 더 화려했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제임스 매티스 전 장군, 전직 상원의원과 고위 관료들이
테라노스 이사회에 참여했다. 회사 규모보다
이사회 이름값이 훨씬 화려해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혈액검사 회사인데
이사회가 혈액검사와 임상병리 전문가보다
정치, 군사, 외교 분야 거물들로 가득했다.
사업적으로는 신뢰감을 줄 수 있었지만
기술이 정말 작동하는지
과학적으로 따져야 하는 회사에는
약점이 될 수 있는 구조였다.
월그린까지 테라노스를 믿었다
미국 대형 약국 체인 Walgreens는
테라노스 검사센터를 매장 안에 설치했다.
2014년 무렵에는 애리조나 등을 중심으로
서비스가 확대되고 있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제 병원이 아니라
동네 약국에서 간단히 피를 뽑아
건강검사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오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기술이 약속을 따라오지 못했다
테라노스는
자체 장비로 대부분의 검사가 가능한 것처럼
사업을 키웠다. 그러나 실제 내부에서는
자체 기계가 할 수 있는 검사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결국 상당수 검사를
기존 업체가 만든 일반 검사장비로
처리하고 있었다.
'피 몇 방울'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기존 검사장비는
테라노스가 홍보한 극소량의 혈액을
전제로 만들어진 기계가 아니었다.
일부 샘플은 희석해서
상용 분석기에 넣는 방식까지 사용됐다.
작은 혈액을 이용한 혁신기술로
검사하는 회사처럼 알려졌지만
뒤에서는 기존 장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개발 실패였다면?
새 기술이 실패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수많은 스타트업이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시작했다가 실패한다.
문제는 안 되는 기술을 개발하다 실패한 것과
되는 것처럼 말하며 돈을 받은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이다.
'언젠가 될 기술'을
'이미 되는 기술'처럼 팔았다
SEC가 문제 삼은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SEC는 홈즈와 테라노스가
자사의 휴대형 혈액분석기가
손가락에서 얻은 혈액으로
광범위한 검사를 할 수 있는 것처럼
투자자들을 오도했다고 판단했다.
군에서 사용했다는 설명도 문제였다
정부의 형사사건 자료에는 테라노스 기술이
미 국방부에 의해 전장에서 사용됐다는 식의
설명이 투자자에게 전달됐다고 나온다.
미국의 대형 제약기업과 연구기관 등이
기술을 검증한 것처럼 설명한 내용도
문제가 됐다. 이런 주장들은
회사가 실제보다 훨씬 검증된 기술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결국 내부에서 먼저 문제가 터졌다
회사의 실상을 알고 있던
전직 직원과 내부 관계자들이
검사 정확성과 운영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 정보가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존 캐리루에게 전달됐다.
2015년 10월 15일
월스트리트저널은
테라노스가 자체 장비를
제공하는 검사 대부분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검사 정확성에도 문제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놓았다.
90억달러 회사의 신화가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날이다.
홈즈는 처음에는 정면으로 맞섰다
홈즈는 보도를 인정하기보다
자신이 혁신을 시도하기 때문에
기존 세력이 공격한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기술혁신가가 기존 질서를 깨뜨릴 때
처음에는 미쳤다고 하고,
그다음에는 싸우려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규제기관까지 움직였다
FDA와 미국 의료검사 규제당국의 조사로
테라노스 기술과 실험실 운영 문제가
계속 드러났다.
FDA가 실제로 허가한 테라노스 검사는
회사가 세상에 보여준 거대한 이미지와 비교하면
극히 제한적이었다.
FDA 자료에서 확인되는 대표 허가는
HSV-1 항체 검사 한 가지였다.
결국 과거 검사결과까지 무효화했다
테라노스는
자체 에디슨 장비로 처리했던
상당수 과거 검사결과를 취소했다.
월그린은 이를 중요한 이유로 들며
2016년 6월
테라노스와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
애리조나의 40개 검사센터도 폐쇄했다.
이것이 단순 투자사기보다 무서운 이유
테라노스는
가상의 소프트웨어 회사가 아니었다.
실제 사람의 피를 검사했다.
검사결과는 임신, 감염,
혈액응고, 약물치료 같은
의료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 환자들도 잘못된 결과를 받았다
형사재판에서는
잘못된 검사결과 때문에
유산했다고 오해하거나
HIV와 관련된 잘못된 결과를 받거나
혈액응고 상태를 잘못 판단한
환자들의 증언이 나왔다.
다만 법적 판단은 구분해야 한다
홈즈가 환자 관련 모든 혐의에서
유죄가 된 것은 아니다. 배심원단은
환자를 상대로 한 사기 공모 혐의와
일부 환자 관련 사기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했다. 최종 유죄는
투자자를 속인 범죄 4건이었다.
2018년 SEC가 먼저 움직였다
SEC는 2018년 3월
홈즈와 테라노스를
대규모 투자사기 혐의로 제재했다.
홈즈는 합의를 통해
50만달러의 민사 벌금을 내고
상장기업 임원이나 이사로
10년간 활동하지 않기로 했다.
테라노스의 의결권 지배력도 포기했다.
그리고 형사사건으로 넘어갔다
2018년 6월 미 연방검찰은
홈즈와 당시 테라노스 사장이었던
라메시 '서니' 발와니를 기소했다.
수년에 걸쳐 투자자와 환자를 속였다는
사기 혐의였다.
홈즈와 발와니는 연인 관계이기도 했다
발와니는 홈즈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고
테라노스의 사장과 COO를 맡았다.
둘은 회사 경영뿐 아니라
사적인 연인 관계이기도 했다.
형사재판은 두 사람을 따로 진행했다.
2022년 1월 유죄
배심원단은 홈즈에게
투자자 사기 공모 1건과
전신사기 3건 등
총 4개 혐의에 유죄를 선고했다.
해당 투자금 송금액만
1억4천만달러가 넘었다.
형량은 11년 3개월
2022년 11월 법원은 홈즈에게
135개월의 연방교도소형을 선고했다.
11년 3개월이다.
3년간의 보호관찰도 뒤따른다.
배상액은 약 4억5,200만달러
법원은 2023년 홈즈와 발와니가 공동으로
피해 투자자들에게
4억5,204만7,268달러를 배상하도록 했다.
발와니의 형량은 더 길었다
별도 재판을 받은 발와니는
기소된 12개 혐의에서 모두 유죄가 인정됐다.
형량은 155개월. 12년 11개월이다.
한때 45억달러 자산가였던 여성은
2023년 5월 30일 텍사스 브라이언의
연방교도소에 수감됐다.
세계 최연소 여성 억만장자로 불리던 사람이
약 9년 만에 연방 수감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2026년에 다시 시작됐다
이미 책도 나왔다.
팟캐스트도 만들어졌다.
2019년에는 HBO 다큐멘터리
'The Inventor'가 나왔다. 2022년에는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홈즈를 연기한
Hulu 드라마 'The Dropout'도 공개됐다.
그런데 2026년 9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작품이 등장했다.
제목은
'You Can See Everything'
한국어로 옮기면
'당신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감독 이름부터 특이하다.
네이선 필더와 랜스 오펜하임이다.
네이선 필더가 왜 홈즈를?
네이선 필더는
평범한 다큐멘터리 감독과는 결이 다르다.
'Nathan for You',
'The Rehearsal' 같은 작품에서
실제 사람과 연출,
진짜 상황과 재연의 경계를 흔드는 방식으로
유명해졌다. 관객이 화면을 보면서도
'이게 진짜인가?'
'지금 누가 누구를 연기하는가?'를
계속 의심하게 만드는 창작자다.
그리고 홈즈는
바로 그런 질문을 남긴 사람이다
검은 터틀넥은 어디까지 실제 자신이었을까?
낮은 목소리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믿음은?
회사가 실패하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거짓말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본인까지 믿게 된 것일까? 필더에게는
거의 이상적인 다큐멘터리 대상인 셈이다.
공동감독 랜스 오펜하임
오펜하임은 'Some Kind of Heaven',
'Spermworld',
HBO의 'Ren Faire' 등으로 알려진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현실 속 사람을 따라가면서도
화면은 극영화처럼 정교하게 구성하는
스타일로 평가받아왔다.
영화는 철저하게 비밀리에 만들어졌다
2026년 9월 6일
텔루라이드 영화제에는
작품명이 공개되지 않은
비밀 상영 시간이 잡혀 있었다.
관객은 극장에 들어갈 때까지
무슨 영화를 볼지 몰랐다.
휴대전화 사용도 엄격히 통제됐다.
그리고 불이 꺼진 뒤 등장한 작품이
'You Can See Everything'이었다.
상영시간은 무려 174분
2시간 54분. 거의 3시간짜리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초기 평가는
길어서 지루하다는 반응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계속 변한다는 평가가 많다.
영화는 감옥 가기 34일 전부터 시작한다
홈즈가 연방교도소에 들어가기
정확히 34일 전. 그녀는
네이선 필더와 랜스 오펜하임에게
자신의 집과 일상을
촬영하도록 허락했다.
홈즈가 먼저 카메라를 불러들였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
기존 작품 대부분은 홈즈와 테라노스를
바깥에서 조사한 이야기였다. 이번 작품은
홈즈가 직접 참여한 프로젝트다.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 잘못 알려졌다는 것을
다시 설명할 기회로
카메라를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급진적 투명성'
홈즈와 파트너 빌리 에번스는
제작진에게 집을 열고
자신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일종의 'radical transparency'를
내세운다. 모든 것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상대가 네이선 필더였다
홈즈가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려 할수록
필더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진짜 솔직한 모습인지,
카메라를 위한 연기인지,
또 하나의 이미지 관리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필더는 결국 집에서 함께 지냈다
수감 약 2주 전부터
필더는 홈즈 가족의 집에 머물면서
보통 다큐멘터리라면 접근하기 어려운
가족생활까지 가까이서 지켜봤다.
카메라 앞의 홈즈는 여전히 부인한다
공개된 예고편에서 홈즈는 필더에게
자신이 그를 속일 이유가 없다는 취지로 말한다.
필더가 지금 진짜 모습이냐고 확인하자
홈즈는 자신은 늘 진실한 모습이라는 입장을 보인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더 묘하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이 느낀 것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사람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고
생활 전체를 촬영해도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지는
끝내 알 수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인데 재연까지 사용한다
홈즈가 감옥에 들어가면
당연히 제작진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카메라를 들고 따라갈 수 없다.
필더와 오펜하임은 그 빈 공간을
독특한 재연 방식으로 채운다.
실제와 연기의 경계가
더욱 흐려지는 구조다.
유명 배우까지 등장한다
영화 후반에는
널리 알려진 할리우드 배우가
홈즈와 관련된 재연에 등장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텔루라이드 상영 뒤
감독들은 관객들에게
그 배우가 누구인지는
정식 개봉 전까지
스포일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이름은 빼는 편이 낫다
이미 일부 매체가
배우의 정체를 공개했지만
이 장치는 영화가 현실과 재연을
어떻게 뒤섞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순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화를 볼 생각이라면
모르고 보는 편이 더 재미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는 홈즈가 유죄인지 따지는 작품이 아니다
법적 결과는 이미 나왔다.
4개 투자사기 혐의 유죄. 135개월 형.
4억5천만달러가 넘는 배상명령.
영화가 새로 묻는 것은
그보다 훨씬 이상한 질문이다.
홈즈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자신의 거짓을 믿는 사람
둘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인다.
한 사람은 진실을 알면서 상대를 속인다.
다른 사람은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스스로 현실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초기 평론들이
이 작품을 단순 범죄 다큐가 아닌
진실과 자아,
연기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보는 이유다.
홈즈 혼자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파트너인 빌리 에번스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두 사람은 두 아이를 두고 있다.
홈즈가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에번스가 가족생활과
홈즈의 외부 이미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놀라운 현재가 연결된다
빌리 에번스는
이미 새로운 혈액검사 스타트업
Haemanthus를 만들었다.
회사는 빛과 AI를 이용해
혈액과 소변,
침 등의 분자정보를 분석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테라노스 2.0 아닙니다'
회사가 직접 이런 표현까지 사용했다.
테라노스처럼
기존 검사를 작게 줄이는 방식이 아니라
라만 분광법과 AI를 이용하는
전혀 다른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홈즈는 회사에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선을 그었다.
왜 굳이 이런 해명을 해야 했을까?
CEO가
엘리자베스 홈즈의 파트너이고
사업 분야가 다시 혈액검사다.
회사 이름 Haemanthus도
'Blood Lily'라 불리는 꽃에서 왔다.
사람들이 테라노스를 떠올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운 구조다.
영화에서도 '다시 시작'의 기운이 보인다
뉴욕타임스가 전한 영화 내용에 따르면
홈즈와 에번스는 미래에 새로운 형태의
혈액검사 사업을 다시 시도하는 생각까지
보여주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것을
홈즈가 현재 Haemanthus를 운영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Haemanthus는 홈즈의 공식 참여를
부인하고 있다.
어쩌면 이 부분이 가장 기묘하다
한 번의 혈액검사 혁명으로
90억달러 회사를 만들었다.
그 약속이 무너져 창업자는 감옥에 갔다.
그런데 10여년이 흐른 뒤 같은 집안에서 다시
혈액검사 스타트업 이야기가 나온다.
테라노스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적은 혈액으로 질병을 더 쉽게 찾는다'는 꿈은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피 한 방울이라는 꿈 자체는
완전한 허상이었을까?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있다.
최근에는 실제 의료기업들이
손끝에서 얻은 소량의 혈액을 이용하는
새로운 검사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일부 기술은 기존 승인된 장비와 결합해
실제 검사에 활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테라노스의 죄는
'꿈을 꾼 것'이 아니다
적은 혈액으로
더 편하고 저렴하게 검사하자는 아이디어는
지금도 의료기술 기업들이 계속 연구하는 분야다.
문제는 미래에 가능할지 모르는 기술을
이미 검증돼 작동하는 기술처럼
투자자와 소비자에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Fake it till you make it'
스타트업에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를 먼저 설명하고
그 미래를 믿는 투자자에게 돈을 받아
제품을 완성하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의료기술에서는
그 문화가 매우 위험해질 수 있다.
앱이 오류 나면 다시 업데이트하면 된다
하지만 혈액검사가 틀리면
사람이 실제로 치료를 받거나,
치료를 포기하거나, 임신 상태를 오해하거나,
약 복용을 바꿀 수 있다.
의료에서 '일단 출시하고 고치자'는 방식이
그대로 통할 수 없는 이유다.
테라노스는 언론의 실패이기도 했다
홈즈가 사기를 친 것과 별개로
한때 수많은 유명 매체가
그녀를 혁신의 상징으로 소개했다.
포춘도 훗날 자사를 포함한 많은 언론이
테라노스를 표지에 올리면서도
월스트리트저널이 밝혀낸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투자자들도 숫자보다 이야기에 끌렸다
19세 스탠퍼드 중퇴생.
바늘을 없애겠다는 꿈.
여성 스티브 잡스. 검은 터틀넥.
거물 이사회. 월그린. 90억달러 기업가치.
각각의 조각이 서로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질문은
기계가 실제로 정확하게 작동하는가였다.
그것을 끝까지 묻는 사람이 적었다
테라노스는 영업비밀을 이유로
기술의 세부내용을 강하게 감췄다.
혁신기업에는 비밀이 필요하다는 논리와
의료기기는 객관적으로 검증해야 한다는 원칙이
충돌했다. 결과적으로
비밀주의가 기술검증을 피하는 방패처럼 작동했다.
그래서 내부고발자가 중요했다
회사 바깥에서는
화려한 투자자와 언론 보도만 보였다.
하지만 안에서는
검사 결과가 불안정하고
자체 장비가 약속만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원들이 먼저 보고 있었다.
외부 검증이 막힌 회사에서는
내부자가 문제를 알리는 역할이
훨씬 중요해진다.
그리고 기자 한 명이 신화를 무너뜨렸다
존 캐리루의 2015년 보도는
테라노스가 가진
90억달러 가치보다 강했다.
회사가 홍보하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실제 기계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었기 때문이다.
2026년 다큐가 다시 묻는 질문도 비슷하다
이번에는 기술이 아니다. 사람이다.
홈즈가 보여주고 싶은 자신과
카메라가 실제로 기록한 자신은 같은가?
모든 것을 보여주면
진실도 자동으로 보이는가?
그 질문이 영화 제목과 연결된다.
'You Can See Everything'은
기존 테라노스 다큐와 무엇이 다른가?
'The Inventor'가
회사의 기술과 사기 구조를 추적했다면
'The Dropout'은
배우를 통해 홈즈의 상승과 추락을
극적으로 재현했다. 이번 작품은
이미 모든 것이 무너진 뒤의 홈즈에게
카메라를 아주 가까이 들이댄다.
감옥 가기 직전의 엄마
두 아이와 함께 생활하고
파트너와 미래를 이야기하며
며칠 뒤 11년 넘는 형을 시작해야 하는
한 사람의 일상이 등장한다.
이 장면만 보면
관객에게 연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연민까지
홈즈가 카메라를 통해 만들어낸 것인지
필더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계속 이어진다. 그가 상영 뒤
3년간 무엇을 경험했는지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말한 이유다.
그래서 네이선 필더라는 선택이 절묘하다
보통 인터뷰어라면
'진실입니까, 거짓입니까?'를 묻는다.
필더는 오히려
상대가 만들어내는 상황 안으로 들어가
그 상황 자체가 얼마나 이상해지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홈즈처럼
자기 자신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온 사람과
궁합이 맞을 수밖에 없다.
텔루라이드 반응은 상당히 강했다
공개 직후 여러 평론가는
이 작품이 단순한 범죄 다큐를 넘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코미디와 리얼리티TV,
재연의 경계를 뒤섞는다고 평가했다.
로저이버트닷컴은
주류 논픽션 영화의 새로운 언어가 될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LA타임스도 올해 영화제 최고작에 넣었다
LA타임스는
텔루라이드에서 본 주요 작품 가운데
'You Can See Everything'을
최고작 목록에 포함했다.
특히 홈즈의 유무죄를 다시 심판하기보다
오늘날 '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끄러워졌는지를 파고드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공개 시점은 언제인가?
A24가 배급한다. 텔루라이드에서는
2026년 9월 6일 세계 최초 공개됐다.
미국 극장 개봉은
2026년 10월 16일로 안내되고 있다.
거의 3시간인데도
왜 벌써 관심이 이렇게 클까?
엘리자베스 홈즈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이 알려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건의 새로운 증거보다
**'홈즈라는 사람 자체가
하나의 연출물이 아니었는가'**를 파고든다.
그래서 알고 있던 이야기를
또 보여주는 다큐와는 방향이 다르다.
어쩌면 홈즈의 가장 성공한 발명품은
에디슨도, 나노테이너도,
테라노스도 아니었을 수 있다.
19살의 천재. 여성 스티브 잡스.
세상을 구하려는 창업자. 검은 터틀넥.
굵은 목소리. 피 한 방울의 혁명.
이 모든 것을 합쳐 만든
'엘리자베스 홈즈'라는 인물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최근 다큐를 두고 일부 미국 매체가
홈즈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은
'엘리자베스 홈즈'였다고 평가하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남은 것은 숫자다
90억달러까지 갔던 기업가치.
45억달러로 평가받았던 개인 재산.
7억달러가 넘는 투자유치. 그리고 결국
4건의 투자자 사기 유죄. 135개월의 징역형.
4억5천만달러가 넘는 배상명령이다.
'피 한 방울'이 실리콘밸리를 속인 것은 아니다
피 한 방울은 말을 하지 않는다.
기계도 스스로 거짓말하지 않는다.
어떤 기술이
지금 어디까지 가능한지 알고 있는 사람이
가능한 미래와
이미 완성된 현실의 경계를 지웠을 때
사기가 시작됐다.
그리고 2026년
카메라는 다시 홈즈 앞에 놓였다
이번에는 투자자가 아니라
관객이 판단해야 한다. 홈즈는 자신이
여전히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카메라는 그녀에게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줄
기회를 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네이선 필더의
'You Can See Everything'이
테라노스 사건을 다시 꺼내든
가장 중요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 우리나라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 상상인
것인지 그들 스스로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ㅉㅉ